목회자 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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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감사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딸 둘이 같은 대학에서 함께 대학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라서 그런지 대학에서 잘 적응할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같은 대학으로 진학을 하여서 걱정거리를 덜어 주셨다. 그런 것까지 섬세하게 돌보아 주시고 인도해 주심에 감사하다. 무숙자 센터에 아동 돌봄 센터를 시작한 것도 감사하다. 사랑이 많으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지역 아이들에게 꼭 필요했던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는 것도 감사하다. 요즘에는 방학기간이라서 그런지 40명 이상의 아동들이 찾아 온다. 말씀과 사랑으로 그들의 영과 혼을 살찌우는 사역이다. 날마다 먹임으로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다. 어려서 받지 못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자라면서 마약과 매춘, 임신 등으로 인생을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목회자 훈련원 사역의 열매도 귀하다. 지난 토요일에 11명이 수료식을 가졌다. 엘파라이소 지역의 목사님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연장 교육 형식으로 시작했었다. 마나구아에서 교수들을 초청해서 시작한 작은 모임이었지만 생각보다 참석하신 분들의 열심에 감동했다. 25명으로 시작해서 11명의 수료자가 생긴 것은 기대 밖의 큰 결실이다. 일년의 기간을 성실과 열심으로 참석해 주신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멀리 마나구아에서 찾아와 섬겨주신 모든 분들이게 감사할 뿐이다. 내년에도 다시 했으면 좋겠다는 참석자들의 부탁으로 대표격인 목회자들과 교수(선생님) 두 분이 함께 모여 계획을 잡아 봤다. 더 많은 분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로 장소를 마나구아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훈련 프로그램 참석 예상자의 수를 이리 저리 알아 봤더니 60명 이상이 참석하실 수 있다고 하신다. 니카라과 백성들의 마음이 원래 선해서 전구 선교사의 귀에 듣기 좋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되지만 60명 이상이라면 적지 않은 수다. 1월 14일로 계획된 준비 모임을 갖고, 2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된다. 니카라과 땅에서 목회자 훈련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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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감사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딸 둘이 같은 대학에서 함께 대학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라서 그런지 대학에서 잘 적응할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같은 대학으로 진학을 하여서 걱정거리를 덜어 주셨다. 그런 것까지 섬세하게 돌보아 주시고 인도해 주심에 감사하다. 무숙자 센터에 아동 돌봄 센터를 시작한 것도 감사하다. 사랑이 많으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지역 아이들에게 꼭 필요했던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는 것도 감사하다. 요즘에는 방학기간이라서 그런지 40명 이상의 아동들이 찾아 온다. 말씀과 사랑으로 그들의 영과 혼을 살찌우는 사역이다. 날마다 먹임으로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다. 어려서 받지 못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자라면서 마약과 매춘, 임신 등으로 인생을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목회자 훈련원 사역의 열매도 귀하다. 지난 토요일에 11명이 수료식을 가졌다. 엘파라이소 지역의 목사님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연장 교육 형식으로 시작했었다. 마나구아에서 교수들을 초청해서 시작한 작은 모임이었지만 생각보다 참석하신 분들의 열심에 감동했다. 25명으로 시작해서 11명의 수료자가 생긴 것은 기대 밖의 큰 결실이다. 일년의 기간을 성실과 열심으로 참석해 주신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멀리 마나구아에서 찾아와 섬겨주신 모든 분들이게 감사할 뿐이다. 내년에도 다시 했으면 좋겠다는 참석자들의 부탁으로 대표격인 목회자들과 교수(선생님) 두 분이 함께 모여 계획을 잡아 봤다. 더 많은 분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로 장소를 마나구아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훈련 프로그램 참석 예상자의 수를 이리 저리 알아 봤더니 60명 이상이 참석하실 수 있다고 하신다. 니카라과 백성들의 마음이 원래 선해서 전구 선교사의 귀에 듣기 좋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되지만 60명 이상이라면 적지 않은 수다. 1월 14일로 계획된 준비 모임을 갖고, 2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된다. 니카라과 땅에서 목회자 훈련은 ...

Tranquilo - 트랑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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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에 비가 쏟아 부은지 4일째 되었다. 동쪽 에 태풍이 오고 있나 보다. 동쪽 해안으로 태풍이 올 때마다 서로 약속을 했듯이 서쪽에는 몇 일동안 비가 쏟아진다. 이럴 때면 무숙자 식구들이 걱정된다. 특별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걱정된다. 어디서 밤을 보내실까? 우기가 찾아 올 때마다 늘 걱정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또는 할 수 없는) 내 자신에 대해 속상할 뿐이다. 몇일 동안 어린이 인성 교육 센터의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소낙비가 오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결석한다. 삼십 명까지 오던 아이들이 겨우 대여섯 명의 아이들만 찾아 온다. 마나구아가 수도이지만 하수도 시설 등등 기반 시설이 열악한 나라다. 그래서 큰 사고를 격을 수있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마비가 쏟아지면 아이들은 학교 조차도 가지 않는 것이 일반이다. 이런 때에는 으슬으슬한 추위(시원함?)에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즐비 하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다시금 인정케 한다. 반면에, 비가 와서 감사 한 것들도 있다. 일년 내내 더운 니카라과에서 가끔 시원함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덕분에 선교 클리닉도 바뻐서 감사하다. 감사와 평안는 이곳 니카라과의 형제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 큰 인생의 교훈이다. 니카라과 사람들은 보고 있으면 절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떻게 저런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함 가운데 평강을 유지 할 수 있을까?” 평안을 사랑하는 니카라과 백성들은 “Tranquilo -트랑킬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영어로 직역하자면 ‘Quiet’ 이고, 우리말로 하자면 ‘잠잠한’이라는 형용사라고 하면 되겠다. 말하자면 큰 흔들림이 없는 수면의 잠잠함, 큰 변화없는 날씨의 고요함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다. 자신의 삶이나 마음에 큰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표현할 때, “트랑킬로”라고 말한다. 무슨 사건이 생긴 후에 ‘괜찬냐’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트랑킬로’ 로 답한다.– ‘별 일없습니다...

섬김은 기쁨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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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멀게 느껴진다. 사실 20분도 걸리지 않는 길이지만 가는 길보다 돌아 오는 길은 길다. 시간의 길이는 주관적이라는 말이 맞다.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전적으로 나의 피곤함에 있음이 틀림없다. 살아도 살아도 익숙해 질 수 없는 선교지의 열대성 기후가 그렇게 만든다. 오래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 할 수 없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그렇지 않다. 돌아 오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속으로 속삭였다. 그렇지만 뚜렷한 울림이 있었다. ‘아, 너무 좋다…..’ 누구라도 곁에 있었다면, ‘참 좋지요?’ 라고 말하며 질문 형식으로 대화를 끄집어 냈을 것 같다. ‘뭐가 그리 좋아요?’라는 질문이 다시 돌아 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냥 마음이 흐믓해요… 나에게도 그 이유는 뚜렷하지 않고 정확이 꼬집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냥 마음에 기쁨과 만족함이 꽉 차 있어요.’ 차 밖에서 밀려 드는 습도는 자동차가 뿜어내는 시원한 에어콘 바람을 무시한다. 소낙비라도 시원하게 내려주면 이 습기를 잠시라도 씻어 버릴텐데… 집으로 오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왜 마음에 이런 기쁨으로 꽉 차 것일까? 그리고, 그 형제의 얼굴이 떠 올랐다. 임마누엘 말티네스 (Imanuel Martinez): 남, 58세, 무숙자, 가족과는 연락이 끊겼음, 촌딸레스 출신, 전 산타니스타 해방군, 전 알콜 중독자 …. 오늘 아침도 늘 하듯이 무숙자 선교관에 섬기고 있었다. 임마누엘 형제가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평소에 조용하고 숫기가 별로 없는 이 형제는 자기의 전 재산이 들어 있는 백팩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한 동안 뒤적거린 후에 조그만 무엇인가를 드디어 찾아낸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조용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가득히 담기는 것이 보였다. 앞에 서 있는 나에게 그것을 건내 주면서 설명을 빼뜨리지 ...

성령은 섬김을 위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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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의료 선교 사역의 스테프들과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간단하게 나누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물론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날 경우도 간혹 있지만,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결국 하나님 섬김이다. 또한 이웃 섬김에 있다. 성령의 능력을 얻은 결과가 자기 중심이 되거나 자신만을 위한 것일 때는 위험하다. 자기 자랑이나, 자기 만족을 위함이 되면 성령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성도의 삶 속에는 섬김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섬김을 위해서 살아가면 나머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이행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대충 그런 메세지의 내용이었다.) 그러니, 다음 주에는 ‘더욱 열심이 섬기자’고 말했다. 설교는 아니었지만 말씀을 통한 짧은 메세지로 프로비덴시아 의료 선교 클리닉의 존재 목적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경우가 되었다. 다음 주에는 여성 암 치료 및 예방 프로그램을 미국의 선교 단체와 함께 진행하는 스케줄이 잡혀 있음을 염두에 두고 나눈 말씀이다. Cervical Cryotherapy (자궁 경관부 냉동 요법) 와 LEEP ( loop electrosurgical excision procedure) 을 통하여 여성의 자궁 경관부에 있을 수 있는 비정상적인 부분을 잘라내고, 그럼으로 자궁암으로 발전하기 전에 치료하는 시술이 된다. 이 시술을 위해서 미국의 선교 기관에서 전문의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 클리닉의 여성과 의사는 그와 함께 일하며 배우는 기간이 되는 것이다. 다음 주에는 일반적인 환자들 이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이 프로그램의 해택을 받기 위해서 드나 들게 될 것이다. 의료 선교관 전체가 들석 들석할 것이고, 환자들에 치어서 모든 스테프들이 지치기 쉬운 경우다. 단단하게 마음의 준비, 영적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심신의 피곤함을 견디지 못해서 짜증 나는 일주일이다. 특...

사랑하는 정헌택 장로님을 보내며

장로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정헌택 장로님의 먼저 떠나심은 슬픔이고 아픔이고 아쉬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왜?’라는 답이 없는 질문을 많이 올렸습니다. 언제가는 누구나 거쳐 가야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떠나셨다고 하니 혼돈스러워졌습니다. 그러던 중 죽음에 대한 어떤 시를 읽었습니다. 내용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항구에 아름다운 한 척의 배가 정착되어 있었다. 이제 출항의 시간이 되어서 배는 항구를 떠났다. 멀리 멀리 떠나 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만 보이던 배가 작아지고 작아지면서 결국 바다와 하늘이 닿는 그 곳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는 하늘 끝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배를 보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이제 사라졌구나!” 그 옆에 사람이 말했다. “사라졌다니요?” 그리고는 설명했다. “사라진 것은 당신의 눈에서만 사라진 것입니다. 사라지는 그 순간,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에게는 나타나는 것죠.”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죠. 저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에게는 나타나는것이 죽음이죠.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쓰셨나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사랑하는 고 정헌택 장로님의 죽음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경건한 성도가 오는 귀중한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헌택장로님은 거룩하신 분이었습니다. 걷는 모습과 몸가짐이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점잔케 목소리를 내리고 말하는 외적인 거룩함도 아닙니다. 가끔 멋진 정장을 하고 나타나실 때는 파마라도 하신 것같은 굵은 곱슬 머리가 어우려져 무슨 영화 배우가 나타나셨나 할 정도로 멋도 부리는 분이었습니다. 말씀 하실 때에는 생각같이 빨리 입이 따라 주지 않으셔서 그러신지 가끔 더듬 거리시기도 하셨습니다. 뭐가 그리 바쁘신지 성가대에서 주일 예배에 들어가실 때의 걸음도 제일 빠르셨습니다. 외적인 거룩한 모습은 별로 찾아 보기 힘...

아동 인성 신앙 교육 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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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년은 된 것 같다. 훌리아 라는 11살쯤 된 예쁘장한 여자 아이였다. 무숙자 센터에 볼 때마다 수줍음없이 다가와 껴안기며 인사했었다. 훌리아는 무숙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무숙자 사역관이 위치한 큰 길을 건너서 킨타니나 라는 동네에 사는 아이다. 그곳은 마나구아의 모든 오물로 오염되어 냄새가 지독한 마나구아 호수에 위치한다. 선진국과 반대로 니카라과은 호수 주변에 가장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이 모인다. 그러다 보니 범죄도 많고, 마약과 매춘이 호수 물같이 범람한 지역이다. 그곳의 부모들은 아침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이고, 집에 있다면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혼자 자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물론 학교가 있지만 소낙비만 내려도 교사들이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기가 태반인 책임지지 않는 공립 교육에 맡겨진다. 벌써 1년 반쯤 되었나 보다. 훌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 아이들에게 물어 봐도 어디갔는지 모르겠다는 대답 뿐이다. 나도 그런가 보다 하며 지냈다. 부모가 조금 더 나은 지역으로 이사하면 아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바람직한 경우이기를 은근히 바란다. 그런데 훌리아가 지난 여름에 무숙자 사역관에 다시 나타났다. 너무 반가워서 안아 주려고 하는데 움추린다. 수줍음을 타는 듯하다. 벌써 열 네 다섯은 되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 동안의 소식을 들어 보려고 말을 걸어도 그저 피하는 느낌이다. 식사를 받고 나면 무숙자 센터를 바쁘게 나간다. 급하게 돌볼 일이라도 있는 소녀 마냥…. 3개월 전쯤 되었나 보다. 훌리아가 동생인듯 싶은 아이를 하나 안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빼앗듯이 받아 안았다. ‘동생이냐?, 조카냐?’ 물으면 아이를 흔들었다. 처음 안기는 나에게도 잘 안겨있어 너무 귀여웠다. 훌리아 자신도 어린 나이에 학교도 가지 못하고 동생을 돌봐야 하는 처지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이 나라에서는 흔히...

2011년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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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 갑니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인도하셔서 저의 삶을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은 계획없이 한 해를 시작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믿음이라고 해야 할지, 무책임이라고 해야 할지… 혼돈 되는 경우다. 그 삶에서 열매를 봐야만 판단이 서는 경우다. 반면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있다. 삶은 스마트 (SMART)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계획은 철저하게 S-M-A-R-T 하다. 구체적 (Specific)이고, 평가할 수 있고 (Measurable), 달성할 수 있고 (Achievable), 타당하고 (Relevant), 기한이 정해진 (Time-bound)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그렇게 철저히 세우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방자한 사람이라 해야 할지… 이런 경우도 난감하다. 미래의 계획에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 시킬 수 있는 믿음의 자리가 없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넉넉함과 여유가 없다. 2011년을 시작하면서 무책임하지 않아야 하고, 방자하지 않게 시작해야 한다. 한편, 계획을 세울 때에는 해야 할 것(Doing)을 중심으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복음 12 장의 한 부자가 그랬다. 밭에 수확이 풍성해서 곳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 부자는 많은 수확을 위해서 곳간을 더 크게 지을 것만을 계획했다. 그리고 편히 쉬고 즐기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해야 할 것, 즉 Doing 에는 많은 관심을 두었지만, 되어야 할 것, 즉 Being 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풍성한 수확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성품, 즉 Being은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부자를 그날 저녁으로 데려가셨다. 계획을 세울 때, 해야 할 것도 세워야 하지만, 되어야 할 것도 함께 세우는 2011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주어진 2011년을...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드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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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용 선교사님과 지난 6년간 동역하며 함께 섬기고 있는 하얄리야 장로교 학교의 졸업식이 금요일에 있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서로의 역할을 바꾸었다. 즉, 노상용 목사님께서 교장으로서 실무를 담당하시고, 나는 뒤에서 목사님의 사역을 밀어주고 돕는 역할로서 이사장의 직분을 맡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졸업식에서 축사를 맡았다. 기도하며 생각하다가 축사의성경 본문을 예례미아 29장 11절 이하로 잡았다. 부정적인 생각에 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니카라과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말씀이다. 누구나 힘든 삶을 살다보면, 그리고 상황이 어려워지면 부정적인 생각에 쉽게 사로 잡힌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바라봐야 할 때,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환경의 지배에서 벋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의 기본 구조까지도 부정적으로 된다. 결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걱정과 염려로 사는 니카라과 백성들이 되었다.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백성이 아니라, 과거에 묶여 사는 백성이 된 것이다. 소망이 아니라 자포자기다. 이번 졸업식에서는 예레미아 29장 11절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이 변해야 믿음의 능력을 힘입어 살수 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 (아니면, 믿음을 가져야 생각이 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던지…) 그래서 예레미아 29장 11절 이하의 말씀으로 간단한 설교를 준비했다. 이 말씀은 요즘 나 자신 개인에게 힘이 되어 왔던 말씀이고 묵상하며 주님께 예배했던 말씀이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 설교의 내용은 간단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생각은 미래가 있는 생각이시고, 소망을 주시는 생각이시다. 평강을 원하시며 우리의 삶에 축복을 원하신다. 물론 때로는 채찍을 드실 때도 있지만, 그것도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말해 주었...

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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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어려울 간(艱)자에 어려울 난(難)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한자이다. 하지만 동음 생략법에 의하여 ‘간’자의 ‘ㄴ’(니은)이 생략됨으로 해서 가난이 되었다. 그렇기에 가난은 어려움이 겹쳐있다는 의미로 무척 힘든 상황을 뜻하리라. 가난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빈곤 역시 가난할 빈 자에 어려울 곤 자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단어로 가난으로 인한 극한 어려움을 뜻한다. 한자의 의미만을 따져보아도 가난은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필요(욕심이 아님)를 채우지 못함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격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가난을 소원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이 부재한 상태를 말하거나 구원 받아야 할 대상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또한 말라기에서 말씀하듯이 가난과 궁핍은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한 채찍이었다. 그렇기에 성경의 말씀을 현실성없이 감상적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가난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거나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물론 영적인 가난은 하나님의 영적 풍성함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마음은 가난하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척 힘든 상황을 ‘마음(영)의 가난’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가난은 주님을 사모하게 만들기에 축복으로 받아드린다. 반면에 육신적 가난도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상태로 성도들을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 영적인 역할이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영적 역할이 있음을 이유로 가난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축복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하심으로 벗어버려야 할 삶의 상황이고, 빈곤의 산은 믿음의 기도와 삶의 수고로 밀어 버려야 하는 고난 덩어리다. 물론 영적인 도전과 도움이 될 수 있기도 하지만… 나는 니카라과에 와서 가난의 실체를 체험했다. 그 전에는 빈곤의 무서움과 추함, 또는 악함을 체험적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더 이상 가난을 ...

연단=쓰임=영광=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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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이야 말로 축복 중에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감사를 잃은 마음, 더 나아가서는 불평하는 마음은 심하게 말하면 저주라고 하겠다. 선교사로서의 나의 삶을 살펴 보아도 그렇다. 힘들 때 일수록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좋으신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 당연히 감사를 잃어서는 않된다는 단순한 논리다. 좋으신 아버지 나를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좋으신 아버지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서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가 있다. 그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적절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주어진 어려움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 이외에는 없다. 잠언 17장 32절의 말씀과 같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연단은 쓰임을 위한 것이고, 쓰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우리는 그런 목적으로 창조되어진 자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요즘에 의료 선교관 사역을 보면서 믿음 없었음에 많은 반성을 한다. 2년 전에 시작한 후에 그렇게도 힘들어 했던 사역이다. 지역 주민들을 섬기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시작한 사역이었다. 그리고 열정과 열심으로 사역을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 초라했다. 의료 선교관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도 많았다. 아버지 앞에 엎드릴 때도 불평조의 기도였던 것을 기억한다. ‘왜 하나님의 도움이 없냐’는 불평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도 좋으신 아버지가 숨어 버리신 듯했다. 시편에서 말씀하시는 ‘나의 산성’, ‘나의 도움’, 나의 방패’ 되시기를 거절하는 듯하...

행복은 줍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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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구아 시에서 서쪽으로 15 마일 정도 떨어진 지역에 ‘라 반데라’라는 마을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아직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곳이다. 공산당 시절에 산디니스타 당을 위해서 내전에 참여 했던 가정들에게 보상 차원으로 이 지역의 땅을 정부에서 분할해 주면서 시작된 마을이다. 친구 목사님의 소개로 아이다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아이다 목사님은 그곳에 지교회식의 개척 교회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지역을 위해서 함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선교사인 나를 초청한 것이다. 라 반데라를 방문했을 때 마을 가정들을 돌아보면서 마을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 ‘자넷 라구나’라는 이름을 가진 자매가 많이 인상에 남는다. 그리고 잠시의 만남이었지만 진한 감동이 나의 마음에 찾아 왔다. 굳이 찾아 온 감동을 굳이 밀쳐 낼 이유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오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넷 자매와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은 집 앞에서 밭 일을 보다 자매가 쉽게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사실 너무 허름했다. 자매는 검은 비니루로 만들어진 집 앞에 널쳐 뒹굴고 있던 호박을 가꾸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올라’ 하고 자넷 자매에게 인사를 했다. 미국말로는 ‘하이’라고 번역하면 적당한 인사말이다. 이 인사말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게 했다. 그리고 잠시지만 자세히 살펴 보는 눈길을 느낄수 있었다. 아마도 마나구아 시내에서나 볼 수 있는 외국인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도 동양인이 아니던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기회다’라고 생각하며 문은 없지만 철사 줄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은 자넷 자매의 집 입구 앞에 섰다. 들어 가도 되는지를 묻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델란떼’ 라는 소리가 급한듯이 들려 왔다. 그렇게 시작된 교제가 적어도 20분 이상 계속되었다. 자넷 자매는 그저 행복하다. 5살짜리 아들을 두었다. 남편은 고깃배도 없이 호수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다. 그래서 그런지 물고기 그물이 벽에 걸려 있...

부질없는 판단

2010년도 벌써 6월을 맞이한다. 세월 빠르다고 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올해 초에 엘파라이소에 위치한 여호와 이레 교회의 하비에르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올해의 계획이 무엇이며,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여쭈었었다. 나와 하비에르 목사님과의 관계는 선교사와 지역 교회 목회자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 이레 교회는 2008년 9월에 니카라과 현지 목사님께서 개척 하셨다. 그런 후에 나를 초청해서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의 놀람이란 상상할 수 없었다. 마치 광야를 연상케 하는 열악한 지역에 개척된 교회라고 보여 준 현장은 2 평 남짓한 땅 위에 올려진 생나무 기둥이다. 그리고 나무가 받치고 있는 함석 철판 6 장이었다. 전기도 없고 가장 기본이 되는 마실 물도 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너무 큰 안타까움으로 인하여 그 지역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호와 이레 교회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물이 없는 사정이 제일 마음이 아파서 우물을 파기를 시작했었다. 그렇게 열악했던 곳이 이제는 전기도 들어오는 지역으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던 중 개척하셨던 목사님께서 떠나는 바람에 여호와 이레 교회를 돌보는 자리를 떠맡게 되었다. 그 때 즈음 하나님의 섭리로 디트로이트 장로 교회의 오병 이어 선교비로 교회 건물이 지어졌다. 그리고 작년 11월에 헌당했다. 그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지역에 많은 선교사님들이 관심을 갖게 되어서 이제는 나 홀로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가까운 지역을 포함해서 4명의 한인 선교사님들과 미국 선교 단체 2개가 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이제는 하비에르 목사님은 단순한 엘 파라이소 지역의 목사님이 아니다. 선교사인 나와 함께 협력하며 동역하는 목사님인 것이다. 그래서 올해 초에 교회의 목표와 계획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지난 주에도 함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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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잠언 16장 9절은 누구나 묵상하고 또한 체험을 통해 고백하는 성경 말씀이다. 특별히 선교하는 자에게는 더욱 많이 체험된다. 그리고 체험 가운데 성경 말씀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며 깨닫게 되는 은혜와 축복이 주어진다. 얼마 전부터 엘 파라이소 교회에서 아동 급식 사역이 시작되었다. 매일 적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모여든다. 우리 아이들이 급식을 받는 모습만을 봐도 절로 즐겁다. 엘 파라이소의 사역을 시작했던 지난 해에 그런 소망이 있었다. - '언젠가는 엘 파라이소 아이들에게 교회를 통해서 급식을 해야지...' 그러나 급식은 재정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흐름이 있어야 하기에 함부로 시작할 수 없는 사역이다. 2008년에 시작했던 아동 급식 사역은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마무리 지어야 했었다. 협력했던 현지 교회에 죄송했고, 찾아 왔던 어린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아픔과 죄송함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떠났다. 전적으로 나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시작했기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들도 나도 같은 아픔 속에 있었다. 그 아픔을 통해서 얻은 교훈도 많다. 열정도 비젼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순리대로 사역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열정만 가지고 사역을 할 수 없다. 열심을 다해 달려 가도 틀린 방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걸음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다렸다. 간절함이 조급함을 가져왔지만 시작하지 않았다. 대신 기도 가운데 기다린다. 예레미아 애가 3장 36절의 말씀이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때로는 파수꾼의 간절함으로 기다려도 아침 태양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실 때 뜬다. 간절함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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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써 왔던 선교 나눔을 쓰는 일이 이번에는 버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벌써 나눌 것은 많이 나누었기에 오는 그런 버겨움일 수도 있다. 물론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돌보심을 나누는 것이 선교 나눔이기에 버겹게 느낄 이유가 없음을 안다. 그러나 이렇게 버겹게 느껴지는 다른 큰 이유가 있다. 쓰고 싶지 않은 내용을 적어서 나누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걱정거리를 나누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하지만, 현재의 마음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기도를 부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솔직히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테가 목사님은 늘 함께 많은 의논을 하고 조언을 얻는 분이다 . 그 분과 식사를 하면서 사역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 그러던 중 무숙자 사역이 너무 부담이 된다는 내용이 튀어 나왔다 . 무엇보다도 그들을 돌보면서 마음의 부담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고 말했다 . 다른 한가지는 사역을 통한 인간적인 보람이 많지 않다 . 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많은 사역이지만 말이다. 또한 동네 사람들의 불평이 너무 무겁게 눌러 왔다고 나의 섭섭함을 이야기 했다. 자기 민족을 돕는 일인데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 하는 마음이다 . 반면에 , 동네 주민들의 불편함과 불평도 이해 할만 하다. 작년 12 월에 한번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 그런 후 2 월 둘째 주일에도 ‘ 마체태 ’ 라는 대칼 싸움이 일어나서 시체를 치운 적이 있다 . 얼마 전에는 시장에 나갔다가 물장사하는 형제를 만났다 . 질문 : ‘ 무초 티엠포 신 베르 떼 , 에르마노. ’ ( 오랫동안 못 뵈었네요 . 형제님 ) 답 :‘ 예 , 마테오 목사님 , 센터로 가다가 칼 맞을 뻔 했어요 . 무서워서 못가요. ’ 노숙자 , 불량배 , 매춘 , 마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