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난


가난은 어려울 간(艱)자에 어려울 난(難)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한자이다. 하지만 동음 생략법에 의하여 ‘간’자의 ‘ㄴ’(니은)이 생략됨으로 해서 가난이 되었다. 그렇기에 가난은 어려움이 겹쳐있다는 의미로 무척 힘든 상황을 뜻하리라. 가난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빈곤 역시 가난할 빈 자에 어려울 곤 자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단어로 가난으로 인한 극한 어려움을 뜻한다. 한자의 의미만을 따져보아도 가난은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필요(욕심이 아님)를 채우지 못함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격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가난을 소원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이 부재한 상태를 말하거나 구원 받아야 할 대상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또한 말라기에서 말씀하듯이 가난과 궁핍은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한 채찍이었다. 그렇기에 성경의 말씀을 현실성없이 감상적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가난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거나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물론 영적인 가난은 하나님의 영적 풍성함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마음은 가난하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척 힘든 상황을 ‘마음(영)의 가난’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가난은 주님을 사모하게 만들기에 축복으로 받아드린다.
반면에 육신적 가난도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상태로 성도들을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 영적인 역할이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영적 역할이 있음을 이유로 가난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축복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하심으로 벗어버려야 할 삶의 상황이고, 빈곤의 산은 믿음의 기도와 삶의 수고로 밀어 버려야 하는 고난 덩어리다. 물론 영적인 도전과 도움이 될 수 있기도 하지만…

나는 니카라과에 와서 가난의 실체를 체험했다. 그 전에는 빈곤의 무서움과 추함, 또는 악함을 체험적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더 이상 가난을 감상적으로 받아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빈곤은 영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감사함으로 받아 드려야 해… 라는 식의 합리화를 버렸다. 왜냐하면 가난은 추함을 낳기 때문이다. 가난으로 생기는 폭력, 살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난으로 낳은 사생아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려 봤기 때문이다. 가난 때문에 학교 책상 앞에서 꿈을 꾸어야 할 소녀들까지도 역겹도록 짙은 화장을 얼굴에 바르고 길거리에 나서는 상황이 눈 앞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가난 때문에 어깨가 무너지도록 무거운 땔감 나무를 매고 가는 소년들을 보며 모르는 척하며 지나가야 했다. 지나가는 소년들을 보고 있는 나의 마음은 늘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걸어서 들어 오지도 못할 정도로 중병이 들어 오는 환자들이 의료 선교관에 찾아 올 때, 그들의 흐트러진 눈에는 질병의 고통 보다도 더 무서운 소망없음이 가을의 쓸쓸함과 같이 퍼져 있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교회를 방문할 때 달려와 반기는 아이들을 끌어 안았을 때 ‘기브 미 원 달라’라고 손을 내미는 4살 짜리의 입술에서 가난의 조롱을 들었기 때문이다. 배고픔과 절망을 잊기 위해서 본드를 입에 물고 쓸어져 누워있는 무숙자 형제들을 날마다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두려움, 무기력, 질병, 폭력, 마약, 죽음, 배고픔, 절망 과 같은 불량배들을 끌고 다니며 지구촌을 괴롭히는 깡패 두목이다. 빈곤은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형벌을 주는 불의다.

10월 17일은 ‘세계 빈곤 퇴치의 날’이다. 빈곤을 퇴치하는 일에 적은 방법이든 큰 방법이든 동참하는 것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다. 물론 축복을 많이 누리는 사람일 수록 나눌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야고보서 2장 15절 이하의 말씀이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며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의 말과 삶의 행동이 분리 될 수없음을 가르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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