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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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 갑니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인도하셔서 저의 삶을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은 계획없이 한 해를 시작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믿음이라고 해야 할지, 무책임이라고 해야 할지… 혼돈 되는 경우다. 그 삶에서 열매를 봐야만 판단이 서는 경우다. 반면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있다. 삶은 스마트 (SMART)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계획은 철저하게 S-M-A-R-T 하다. 구체적 (Specific)이고, 평가할 수 있고 (Measurable), 달성할 수 있고 (Achievable), 타당하고 (Relevant), 기한이 정해진 (Time-bound)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그렇게 철저히 세우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방자한 사람이라 해야 할지… 이런 경우도 난감하다. 미래의 계획에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 시킬 수 있는 믿음의 자리가 없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넉넉함과 여유가 없다. 2011년을 시작하면서 무책임하지 않아야 하고, 방자하지 않게 시작해야 한다. 한편, 계획을 세울 때에는 해야 할 것(Doing)을 중심으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복음 12 장의 한 부자가 그랬다. 밭에 수확이 풍성해서 곳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 부자는 많은 수확을 위해서 곳간을 더 크게 지을 것만을 계획했다. 그리고 편히 쉬고 즐기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해야 할 것, 즉 Doing 에는 많은 관심을 두었지만, 되어야 할 것, 즉 Being 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풍성한 수확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성품, 즉 Being은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부자를 그날 저녁으로 데려가셨다. 계획을 세울 때, 해야 할 것도 세워야 하지만, 되어야 할 것도 함께 세우는 2011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주어진 2011년을...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드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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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용 선교사님과 지난 6년간 동역하며 함께 섬기고 있는 하얄리야 장로교 학교의 졸업식이 금요일에 있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서로의 역할을 바꾸었다. 즉, 노상용 목사님께서 교장으로서 실무를 담당하시고, 나는 뒤에서 목사님의 사역을 밀어주고 돕는 역할로서 이사장의 직분을 맡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졸업식에서 축사를 맡았다. 기도하며 생각하다가 축사의성경 본문을 예례미아 29장 11절 이하로 잡았다. 부정적인 생각에 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니카라과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말씀이다. 누구나 힘든 삶을 살다보면, 그리고 상황이 어려워지면 부정적인 생각에 쉽게 사로 잡힌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바라봐야 할 때,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환경의 지배에서 벋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의 기본 구조까지도 부정적으로 된다. 결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걱정과 염려로 사는 니카라과 백성들이 되었다.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백성이 아니라, 과거에 묶여 사는 백성이 된 것이다. 소망이 아니라 자포자기다. 이번 졸업식에서는 예레미아 29장 11절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이 변해야 믿음의 능력을 힘입어 살수 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 (아니면, 믿음을 가져야 생각이 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던지…) 그래서 예레미아 29장 11절 이하의 말씀으로 간단한 설교를 준비했다. 이 말씀은 요즘 나 자신 개인에게 힘이 되어 왔던 말씀이고 묵상하며 주님께 예배했던 말씀이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 설교의 내용은 간단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생각은 미래가 있는 생각이시고, 소망을 주시는 생각이시다. 평강을 원하시며 우리의 삶에 축복을 원하신다. 물론 때로는 채찍을 드실 때도 있지만, 그것도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말해 주었...

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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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어려울 간(艱)자에 어려울 난(難)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한자이다. 하지만 동음 생략법에 의하여 ‘간’자의 ‘ㄴ’(니은)이 생략됨으로 해서 가난이 되었다. 그렇기에 가난은 어려움이 겹쳐있다는 의미로 무척 힘든 상황을 뜻하리라. 가난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빈곤 역시 가난할 빈 자에 어려울 곤 자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단어로 가난으로 인한 극한 어려움을 뜻한다. 한자의 의미만을 따져보아도 가난은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필요(욕심이 아님)를 채우지 못함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격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가난을 소원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이 부재한 상태를 말하거나 구원 받아야 할 대상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또한 말라기에서 말씀하듯이 가난과 궁핍은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한 채찍이었다. 그렇기에 성경의 말씀을 현실성없이 감상적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가난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거나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물론 영적인 가난은 하나님의 영적 풍성함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마음은 가난하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척 힘든 상황을 ‘마음(영)의 가난’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가난은 주님을 사모하게 만들기에 축복으로 받아드린다. 반면에 육신적 가난도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상태로 성도들을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 영적인 역할이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영적 역할이 있음을 이유로 가난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축복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하심으로 벗어버려야 할 삶의 상황이고, 빈곤의 산은 믿음의 기도와 삶의 수고로 밀어 버려야 하는 고난 덩어리다. 물론 영적인 도전과 도움이 될 수 있기도 하지만… 나는 니카라과에 와서 가난의 실체를 체험했다. 그 전에는 빈곤의 무서움과 추함, 또는 악함을 체험적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더 이상 가난을 ...

연단=쓰임=영광=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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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이야 말로 축복 중에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감사를 잃은 마음, 더 나아가서는 불평하는 마음은 심하게 말하면 저주라고 하겠다. 선교사로서의 나의 삶을 살펴 보아도 그렇다. 힘들 때 일수록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좋으신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 당연히 감사를 잃어서는 않된다는 단순한 논리다. 좋으신 아버지 나를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좋으신 아버지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서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가 있다. 그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적절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주어진 어려움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 이외에는 없다. 잠언 17장 32절의 말씀과 같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연단은 쓰임을 위한 것이고, 쓰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우리는 그런 목적으로 창조되어진 자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요즘에 의료 선교관 사역을 보면서 믿음 없었음에 많은 반성을 한다. 2년 전에 시작한 후에 그렇게도 힘들어 했던 사역이다. 지역 주민들을 섬기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시작한 사역이었다. 그리고 열정과 열심으로 사역을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 초라했다. 의료 선교관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도 많았다. 아버지 앞에 엎드릴 때도 불평조의 기도였던 것을 기억한다. ‘왜 하나님의 도움이 없냐’는 불평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도 좋으신 아버지가 숨어 버리신 듯했다. 시편에서 말씀하시는 ‘나의 산성’, ‘나의 도움’, 나의 방패’ 되시기를 거절하는 듯하...

행복은 줍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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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구아 시에서 서쪽으로 15 마일 정도 떨어진 지역에 ‘라 반데라’라는 마을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아직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곳이다. 공산당 시절에 산디니스타 당을 위해서 내전에 참여 했던 가정들에게 보상 차원으로 이 지역의 땅을 정부에서 분할해 주면서 시작된 마을이다. 친구 목사님의 소개로 아이다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아이다 목사님은 그곳에 지교회식의 개척 교회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지역을 위해서 함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선교사인 나를 초청한 것이다. 라 반데라를 방문했을 때 마을 가정들을 돌아보면서 마을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 ‘자넷 라구나’라는 이름을 가진 자매가 많이 인상에 남는다. 그리고 잠시의 만남이었지만 진한 감동이 나의 마음에 찾아 왔다. 굳이 찾아 온 감동을 굳이 밀쳐 낼 이유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오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넷 자매와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은 집 앞에서 밭 일을 보다 자매가 쉽게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사실 너무 허름했다. 자매는 검은 비니루로 만들어진 집 앞에 널쳐 뒹굴고 있던 호박을 가꾸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올라’ 하고 자넷 자매에게 인사를 했다. 미국말로는 ‘하이’라고 번역하면 적당한 인사말이다. 이 인사말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게 했다. 그리고 잠시지만 자세히 살펴 보는 눈길을 느낄수 있었다. 아마도 마나구아 시내에서나 볼 수 있는 외국인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도 동양인이 아니던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기회다’라고 생각하며 문은 없지만 철사 줄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은 자넷 자매의 집 입구 앞에 섰다. 들어 가도 되는지를 묻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델란떼’ 라는 소리가 급한듯이 들려 왔다. 그렇게 시작된 교제가 적어도 20분 이상 계속되었다. 자넷 자매는 그저 행복하다. 5살짜리 아들을 두었다. 남편은 고깃배도 없이 호수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다. 그래서 그런지 물고기 그물이 벽에 걸려 있...

부질없는 판단

2010년도 벌써 6월을 맞이한다. 세월 빠르다고 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올해 초에 엘파라이소에 위치한 여호와 이레 교회의 하비에르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올해의 계획이 무엇이며,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여쭈었었다. 나와 하비에르 목사님과의 관계는 선교사와 지역 교회 목회자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 이레 교회는 2008년 9월에 니카라과 현지 목사님께서 개척 하셨다. 그런 후에 나를 초청해서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의 놀람이란 상상할 수 없었다. 마치 광야를 연상케 하는 열악한 지역에 개척된 교회라고 보여 준 현장은 2 평 남짓한 땅 위에 올려진 생나무 기둥이다. 그리고 나무가 받치고 있는 함석 철판 6 장이었다. 전기도 없고 가장 기본이 되는 마실 물도 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너무 큰 안타까움으로 인하여 그 지역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호와 이레 교회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물이 없는 사정이 제일 마음이 아파서 우물을 파기를 시작했었다. 그렇게 열악했던 곳이 이제는 전기도 들어오는 지역으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던 중 개척하셨던 목사님께서 떠나는 바람에 여호와 이레 교회를 돌보는 자리를 떠맡게 되었다. 그 때 즈음 하나님의 섭리로 디트로이트 장로 교회의 오병 이어 선교비로 교회 건물이 지어졌다. 그리고 작년 11월에 헌당했다. 그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지역에 많은 선교사님들이 관심을 갖게 되어서 이제는 나 홀로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가까운 지역을 포함해서 4명의 한인 선교사님들과 미국 선교 단체 2개가 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이제는 하비에르 목사님은 단순한 엘 파라이소 지역의 목사님이 아니다. 선교사인 나와 함께 협력하며 동역하는 목사님인 것이다. 그래서 올해 초에 교회의 목표와 계획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지난 주에도 함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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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잠언 16장 9절은 누구나 묵상하고 또한 체험을 통해 고백하는 성경 말씀이다. 특별히 선교하는 자에게는 더욱 많이 체험된다. 그리고 체험 가운데 성경 말씀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며 깨닫게 되는 은혜와 축복이 주어진다. 얼마 전부터 엘 파라이소 교회에서 아동 급식 사역이 시작되었다. 매일 적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모여든다. 우리 아이들이 급식을 받는 모습만을 봐도 절로 즐겁다. 엘 파라이소의 사역을 시작했던 지난 해에 그런 소망이 있었다. - '언젠가는 엘 파라이소 아이들에게 교회를 통해서 급식을 해야지...' 그러나 급식은 재정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흐름이 있어야 하기에 함부로 시작할 수 없는 사역이다. 2008년에 시작했던 아동 급식 사역은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마무리 지어야 했었다. 협력했던 현지 교회에 죄송했고, 찾아 왔던 어린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아픔과 죄송함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떠났다. 전적으로 나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시작했기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들도 나도 같은 아픔 속에 있었다. 그 아픔을 통해서 얻은 교훈도 많다. 열정도 비젼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순리대로 사역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열정만 가지고 사역을 할 수 없다. 열심을 다해 달려 가도 틀린 방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걸음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다렸다. 간절함이 조급함을 가져왔지만 시작하지 않았다. 대신 기도 가운데 기다린다. 예레미아 애가 3장 36절의 말씀이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때로는 파수꾼의 간절함으로 기다려도 아침 태양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실 때 뜬다. 간절함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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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써 왔던 선교 나눔을 쓰는 일이 이번에는 버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벌써 나눌 것은 많이 나누었기에 오는 그런 버겨움일 수도 있다. 물론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돌보심을 나누는 것이 선교 나눔이기에 버겹게 느낄 이유가 없음을 안다. 그러나 이렇게 버겹게 느껴지는 다른 큰 이유가 있다. 쓰고 싶지 않은 내용을 적어서 나누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걱정거리를 나누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하지만, 현재의 마음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기도를 부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솔직히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테가 목사님은 늘 함께 많은 의논을 하고 조언을 얻는 분이다 . 그 분과 식사를 하면서 사역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 그러던 중 무숙자 사역이 너무 부담이 된다는 내용이 튀어 나왔다 . 무엇보다도 그들을 돌보면서 마음의 부담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고 말했다 . 다른 한가지는 사역을 통한 인간적인 보람이 많지 않다 . 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많은 사역이지만 말이다. 또한 동네 사람들의 불평이 너무 무겁게 눌러 왔다고 나의 섭섭함을 이야기 했다. 자기 민족을 돕는 일인데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 하는 마음이다 . 반면에 , 동네 주민들의 불편함과 불평도 이해 할만 하다. 작년 12 월에 한번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 그런 후 2 월 둘째 주일에도 ‘ 마체태 ’ 라는 대칼 싸움이 일어나서 시체를 치운 적이 있다 . 얼마 전에는 시장에 나갔다가 물장사하는 형제를 만났다 . 질문 : ‘ 무초 티엠포 신 베르 떼 , 에르마노. ’ ( 오랫동안 못 뵈었네요 . 형제님 ) 답 :‘ 예 , 마테오 목사님 , 센터로 가다가 칼 맞을 뻔 했어요 . 무서워서 못가요. ’ 노숙자 , 불량배 , 매춘 , 마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