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넣고 선교 의료관의 문을 디자인해 보았다. 이곳을 보기만 해도 주님 앞으로 나오는 느낌이 있기를 바라면서.


로베르토 목사님은 타버나클로 교회의 담임으로 섬기신다. 새롭게 옮겨서 시작하는 클릭닉의 건물이 이 교회에 속해 있다. 그리고 클리닉 리모델링 공사를11월 초에 시작했다. 큰 공사로 시작하지는 아니지만 결국에는 많은 부분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왕 할 바에 잘 해 보고 싶었다. 클리닉의 모습 자체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찾아 오게 되기를 원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많은 부분을 조금씩 변경하게 되는 결과가 됐다. 벽도 새로, 낡은 지붕도 새로, 바닥도 새롭게, 전기 배선도 새로, 화장실도 새로결국에는 기초와 건물 구조만 바꾸지 않고 거의 모든 부분을 새롭게 만지는 리모델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오래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재정이 허용하는 한도에게 보기 좋게 하고 싶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클리닉이 아닌가?

건물 소유주인 타버나클로 교회의 당회는 계획보다 커진 공사의 규모로 의아해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좋아 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 소유주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우리야 선교의 동역자로서 그 건물을 사용하고 사역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지, 결국은 당신들의 교회 건물에 우리들이 투자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것도 안팎으로 보기 좋게 리모델링을 하며 업그레이드 하는 경우이다.

올해 7월 쯤의 일이다. 타버나클로 교회의 당회로부터 사역의 동역을 위해서 미팅을 하면서 이런 질문이 오고 갔다. 클리닉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렵니까?” 나는 많이 생각지 않고 대답했다. 저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는데 방해되지 않으면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안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름이야 '철수네 클리닉'이면 어떠랴, 주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사역의 내용이 중요하지…’ 물론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아니지만. 이름만 봐도 주님의 사랑이 절로 전해질 수 있다면 물론 금상첨화다.

오늘은 11 24. 리모델링을 맡은 건축 담당자 돈 훌리오형제에게 이메일을 받았다. 리모델링의 90프로 이상 완성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전체 페인트와 조경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타버나클로 교회의 담임으로 섬기는 로베르토 형제를 찾아갔다. (이곳에서는 목사와 성도 간에도, 목사와 목사 간에도, ‘형제’, ‘자매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와 같이 위계 질서가 심한 기독교 문화도 드물다.) 로베르토 형제여,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습니다. 클리닉의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나의 질문에 조금 의아해 한다. 교회는 건물 주인이지 클리닉의 주인은 아닌데 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분위기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로베르토 형제여, 클리닉의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생각해 보셨습니까?”

황당한 질문에 로베르토 목사님으로부터 급조한 대답이 달려 나온다. “… ‘클리닉 에스페란사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것이 당신 선교 단체의 이름 아닙니까?” 로베르토 목사님께 설명을 드렸다. 목사님, 그 이름은 저희 선교단체 이름이구요. 목사님 교회에서 원하시는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이 클리닉은 저희 선교단체에서 시작하고 운영을 하지만 잘 운영되고 안정되면 교회로 사역을 넘겨서 교회의 사역으로 하셔야 하죠. 저는 선교사입니다. 저야 이곳에 손님이죠. 그러니 교회에서 원하시는 이름을 하나 정해 주세요.” 나의 설명이 로베르토 목사님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잘 리모델링하고 투자한 선교 의료관을 안정시킨 후에 당신의 교회에 이양할 계획이라고 설명하니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내 앞에서 드러내 놓고 좋아하기는 체면이 깍기고, 그렇다고 감정을 숨기기는 힘들고…. 아주 난처한 표정이시다. 그렇지만 목사님의 내면에는 기쁨의 놀람이 흘러 나오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잘 섬김을 받은 자에게서 볼 수 있는 기쁨이 흘러 나온다.

결국 선교는 섬김이다. 그리고 섬김은 비움이다. 자신을 채우기 위한 목적에서는 섬김이 나올 수 없다.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이 섬김이다. 섬김은 상대방에 의해서 좌우되는 행위가 아니다. 대가를 바라거나 또 특정한 결과를 바라는 행위도 아니다. 섬김은 남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존중함으로 진행되는 자발적인 행동이다. 그러기에 요구 되어서 나오는 행동은 섬김이 아니다. 먼저 섬김을 받은 자가 감사한 마음이 동기가 되어 스스로 행하는 열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서 그렇게 섬기시며 살아가셨다. 그런 후에 제자된 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섬김의) 본을 보였노라"( 13:15)

오늘도 주님의 말씀대로 섬김을 배우며 훈련한다. 섬김과 신앙이 분리되어진 우리의 신앙 전통에서 벗어나 보려고 오늘도 애써 본다. 벌써 12월을 맞이한 올 해는 얼마나 섬기며 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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