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착한 길을 걷는 이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 인형을 들고 기뻐하는 아브라함의 모습
예수님은 일부러 좁은 길을 걸으신 분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좁은 문을 찾아 가라고 말씀하신다. 미국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그런 삶을 산 사람이 있다.헨리 나우웬 박사다. 전에 목회했던 코네티컷의 뉴 헤이븐에 위치한 명문 예일 대학의 신학 대학원에서 교수 생활을 하셨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으로 옮기셔서 강의했던 유명한 영성 학자셨다. 그러던 그가 교수직을 사퇴하고 카나다에 있는 정신장애 교육 시설인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의 봉사원으로 자원하셨다 . 그리고 정신박약아 장애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기독교계가 흔들릴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기자들이 찾아가서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예수님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 분이 걸으셨던 길을 걸어 보아야 합니다. 좁은 문, 험한 길을 걸어 보아야 합니다. 머리로만 성경을 이해하였는데 장애인들을 도우면서 몸으로 예수님을 이해해 보겠습니다” 좁은 문을 찾아 나서는 자들 중에 성경에서는 모세, 에스더, 그리고 바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넓고 편한 곳에서 좁고 험한 곳으로 자원해서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반면에, 세상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좁고 험한 곳에서 있는 사람들이 많다. 니카라과에 와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산다. 니카라과의 80프로 이상으로 선택이 아닌 운명적으로 좁고 험한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유엔의 통계로 볼 때 빈민 생활자에 속한다. 오늘 만난 아홉 살 된 소년은 그 중에 대표적이고 하겠다.
미국 북 버지니아 지역에서 찾아온 워싱톤 한인 교회의 선교팀은 함께 의료사역과 어린이 사역을 중심으로 일 주일을 함께 보냈다. 니카라과에서 가장 더운 지역이라고 하는 치난데가의 현지인 교회와 함께 사역을 했고 나머지 3일은 수도 마나구아에서 무숙자 선교관과 현지인 교회의 목사님들과 함께 사역을 했다. 그 중에 하루는 메르카도 오리엔탈(동대문 재래 시장)에서 위치한 ‘전능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복음 교회’(루이스 목사님 담임)에서 사역을 했다.
오후 3시경 어린이 사역을 마칠 때 쯤 해서 선교팀이 가지고 온 비니 베이비 인형들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순식간에 아이들이 몰려 들었고 시끌버쩍하는 바람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멈추어 서서 ‘무슨 일이 있나’ 하며 구경한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비니 베이비 인형을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주위의 사람들은 소란스러움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교회에 들어가서 받아가고 싶은 사람들을 교회로 찾아 들어 가고,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자기의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런 구경꾼들 중에 하나였던 아브라함이라는 소년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홉 살 된 아브라함은 부모의 행방 조차도 모른다. 그래서 시장 주변에 살고 있는 할머니와 함께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리고 생활을 돕기 위해서 일찍부터 시장에서 계약 맺은(?) 상점들의 물건을 운반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간다고 한다. 성인이 아닌 아이에게 이 일을 시키려니 끌고 다니는 구르마도 아이의 몸 크기에 맞게 줄여서 만든 듯 하다. 빈 구르마를 끌고 가던 아브라함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으로 인해 멈추어 구경하다가 갈등이 생긴 듯하다. 어른과 같은 생활고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동심. 교회에 들어가서 인형 하나 얻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가족의 생계 수단인 구르마를 팽기치고 갈 수는 없는 입장이다. 한 십분 정도는 움직이지 못하고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나도 멀리 서서 보고 있었지만 그 소년의 눈동자 속에 드러난 안타까움과 속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비니 베이비 인형을 나누어 주는 장소로 비집고 들어가서는 선생님으로부터 캉가루 모양의 인형을 빼았듯이 얻어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건네 주었다. 소년의 입에서 끝 없는 행복이 넘쳐 흘렀다. 사나운 운명으로 인하여 협착한 길을 걷고 있지만 마음을 동심으로 가득 차 있다. 아브라함을 보고 있으니 잠시 동안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이 생길 정도였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 아브라함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듯한 행복한 모습으로 구르마를 끌고 발길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아브라함을 보고 있다가 얼른 생각이 나서 달려가 세웠다. 그리고 사진으로 아브라함의 모습을 옮겨 보았다. 그리고 캉가루 인형을 안고 좋아 하는 아브라함을 붙잡고 가정 환경도 물었다. 하찮은 인형 하나 건네 주고 너무 많이 물어 보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너를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축복 기도를 해 주고 보냈다.
큰 길, 넓은 문으로만 들어 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질문 할 것이다. “너희는 왜 나를 따른다 하면서 협착한 길, 좁은 문을 마다했냐?” 반면에, 선택의 여지 없이 협착한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갔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할 것 같다. “예수님, 더 협착한 길, 더 좁은 문이 있었습니까?” 이들은 또 물을 것이다. “높아 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 지고자 하는 자는 높임을 받으리라”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더 낮아질 수 있었습니까?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삶을 가르치셨는데 지금보다 더 섬기고 살아야 합니까? 세리와 창기의 친구라 하고 하신 예수님의 답변이 궁금하다.
협착한 길을 걷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와 소망이 되어야 하는데 하는 안타까움으로 살아간다. 아브라함의 큰 미소와 같은 행복에 찬 기쁨을 선택의 여지없이 협착한 길을 걷는 이들에게 잠시라도 나누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무숙자 사역관에서 식사를 받아 가는 사람들이 ‘고맙다’는 말을 할 때마다 ‘주님…’하는 한숨 같은 기도만 길게 흘러 나온다. 좁은 문을 들어가는 자, 협착한 길을 걷는 자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를 책망하시는 듯하다. 요즘은 평탄한 길, 넓은 문을 드나드는 자로서의 아픔이 더욱 심해진다. 이런 종류의 아픔의 진통제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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