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고민


<-- 졸업식의 모습, 11월이면 감사와 함께 반성해 본다.

11월이 되면 하얄리야 기독교 학교의 책임자로서 두 가지 중요한 일을 치룬다.
우선, 장로교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를 준비해야 한다. 졸업식이다. 배움의 업을 마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새로운 영역으로 옮기어 계속된다는 기대가 넘치는 행사이다. 학부형들로부터 지난 일년간 위임 받았던 우리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을 큰 탈없이 마쳤다. 이 때쯔음 되면 안도감의 감사가 절로 나온다. 올해에는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성도 해 본다. 몇 가지 큰 일들이 있었지만 이만하기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특히 두 번의 무장 강도 사건 속에서도 아무도 다치지 않게 지켜주신 주님의 보호하심에 감사를 드린다.

반면에 나를 영적으로 많이 어렵게 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동네 아이의 유괴 살인 사건이었다. 동네에서 그래도 조금 잘 산다는 가정의 아이가 우리 학교에 다닌다. 그 아이를 유괴하여 돈을 요구하려했던 유괴범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실수(?)로 정작 지목했던 아이가 아닌 동네의 다른 아이를 유괴한 것이다. 다른 아이의 부모는 찟어지게 가난하였고, 결국 요구한 돈을 지불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가정의 이 아이는 살해되어서 온 나라가 잠시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그리고 학교 뒷마당에 내다 버려져서 우리 학교는 또 다시 곤욕을 치루었다.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사건이었다. 그 때에 요구했던 금액이 현찰 이만 코르도바였다고 한다. 환율이 18.50 대 1 정도였으니 미국 달라로 환산하면 1000불이 조금 넘는 돈으로 계산이 나온다.

슬픔과 괴로움 가운데에서도 그래도 조금의 위로가 되었던 것은 영문도 모르고 세상을 달리한 아이가 우리 학교에 적을 두고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안도감은 잠시였고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가졌던 자체를 괴로와 했던 기억이 아직도 살아서 나의 아픔이 되곤 한다. 그 아이의 삶이 성인이 되어서 불행했을 수도 있고 행복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 살아 보지 못하고 단 돈 천불에 빼앗겨야 했던 생명이 너무 아까웠고 끝까지 나를 괴롭혔다.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가난 때문에 아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그 부모는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아니면 이렇게 만든 세상을 증오했을까? 아들 생각에 어떻게 잠을 청할 수 있으며, 어떻게 숫가락을 들어 밥을 입에 넣을 수 있을까? 땅을 치며 한탄했을 것이다. 그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면 나는 어느덧 죄인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서도 나는 비겁했다. 그 부모를 찾아가 위로하지도 못했고 학교 교장 선생님 카티에게 부탁해서 학교 이름으로 부조금을 보낸 것으로 나의 책임을 전가했다.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몇 일동안 학교 길을 내려갈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구토증과 같이 것이 생겼다고 할까? 내가 몸 담아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불공평함과 불의함의 지독한 악취가 나를 어지럽게 했다. 그 부모의 한탄과 원망, 그리고 이유도 모르고 삶을 마쳐야 했던 그 아이의 허전한 눈동자, 나도 모르게 죄인이 되어 숨어버린 나의 비겁함이 뒤섞여서 나의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그 사건을 치룬 후 며칠 동안 학교 일을 보지 못했는데, 세월이 약이라고 벌써 올해의 졸업식을 준비하고 있다.

졸업식과 함께 11월에 준비해야 하는 결정 사항 있다. 내년의 월사금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성회비, 육성회비, 납입금 등과 같이 그동안 명칭이 바뀌었었다. 지난 두 달간 학교 교장 선생님들과 말씀을 나누면서, 그리고 신문의 기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요즘 니카라과의 경제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극 사회주의로 변화되면서 외국인의 투자가 줄어들어 서민들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그와 함께 석유값의 급등으로 모든 물가가 크게 올랐다. 그리고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와서 농작물의 수확에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작년에 10파운드의 쌀을 구입할 수 있었던 금액으로 올해는 7 파운드 뿐이 구입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땅에서 나는 단백질이라고 불리우는 팥 가격도 거의 두배가 되었다. 그래서 서민들 중에, 특별히 딸린 식구가 많은 가정은 하루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나도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다. 70년대 초반에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두평도 안 되는 한 칸 전세방에서 식구 다섯이 꾸겨 살던 때다. 저녁에 어머니는 자식들을 먼저 먹이셨다. 그리고 남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어머니의 저녁 식사였다.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어린 내가 한번은 철없는 질문을 했다. ‘엄마, 왜 밥 안 드세요?’ 그리고는 그 질문의 대가로 형한테 군밤을 크게 얻어 맞은 적이 있다. 못 드시는 어머니를 보며 먹히지 않던 밥을 눌러 넣고 있었던 형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던 것이다. 역시 군밤의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나의 질문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 안 드시는 것이 아니라 못 드시는 것임을 깨닫고 철없는 어린 마음도 어머니의 사랑의 희생에 숙연해 졌던 기억이 있다.

하여간 이 나라의 상황이 이렇게 어렵다 보니 학교의 월사금을 올리면 그들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것이 분명하다. 한끼를 줄이면서라도 자식들 교육은 시켜야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 부모의 교육열이지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찾아 볼 수 없다. 월사금을 줄여도 힘든 판국에 올린다면 아마도 많이 부모들이 자녀들의 교육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아이들에게 기독교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게 해 달라는 나의 기도에 반대인 결정을 스스로 하는 경우가 된다.

그래서 결국 두 가지 결정을 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교사가 책임지고 있는 학교인데 … 하는 자부심과 기도 가운데서 나온 결정이다. 우선 월사금을 올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올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장학금도 늘려야겠다. 둘째로, 교사들의 월급을 20프로 인상하는 결정이다. 만약 교사들의 가정이 세끼를 먹지 못한다면 어찌 내가 편히 먹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고백을 하는 신앙인으로서의 결정이라 생각했다. 올해도 이만하면 감사가 넘친다. 어려움은 주위 환경과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데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뚜렷히 확인하였다. 선교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훈련의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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