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은 믿음의 행위


히브리서 12:1-2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5월 8일, 오늘은 학교의 분위기가 아침부터 들떠 있다. 오전 9시 전에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모두 모였다. 학교의 체육복을 입고 친한 아이들 끼리 모여서 속닥이고 있다. 중고등학교는 일반적으로 오후반이지만 오늘은 아침에 모였다. 오늘이 바로 마사야 화산을 견학하기 위해서 일일 학습 여행하는 날이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중에서 이곳을 가 본 아이들이 하나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서민 가정으로서는 마사야 화산를 구경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시외로 한시간, 그리고 산의 정상까지 오르려면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3 시간, 그렇지 않으면 족히 4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선생님들 중에도 한번도 가보지 못하신 분들이 다수다. 그들에게도 큰 관광 거리가 된 것이다.
대절한 버스가 도착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함께 기도를 했다. ‘사고 없이 잘 다녀 오게 하시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 주소서…” 버스에 앞에 서서는 승차하는 아이들 하나 하나를 기도하며 머리에 손 얹어 축복해 주었다. ‘이들이 잘 교육 받아서 좋은 하늘 나라의 일꾼, 니카라과의 지도자들 되게 해 주세요.’ 버스를 보내면서 흐믓함으로 가득 채워지는 기쁨을 느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는 일을 행하며 살 때, 이웃과 나누면서 살 때 큰 기쁨과 보람이 주어진다’라는 이 삶의 진리을 잘 알면서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조금 더 벌기 위해서, 조금 더 같기 위해서, 조금 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말이다. 미국에서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그곳은 너무 풍성한 곳이다. 편하고 환경도 너무 좋은 곳이다. 흔히 듣는 이야기, ‘미국같은 곳 없다’는 말이 분명히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은 것도 많은 삶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견학 보내면서 큰 기쁨을 누렸던 반면에 무숙자 사역에서는 실망이 너무 컷었다. 이번 달부터 새롭게 시작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거의 한 달은 준비를 해서 겨우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무숙자 선교관에 찾아오는 동네 아이들 중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가정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로 약속을 받았다. 학교를 위해서 필요한 재정 및 모든 것은 우리 선교관에서 제공하기로 우리도 약속을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교복도 사주고, 가방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고 해서, 드디어 학교에 등록을 시켰다. 그들을 향한 나의 바램을 사실 큰 것이 아니었다. 할 일없이 길거리에서 지내는 것보다 공부를 잘 하지 못해도 학교에서 지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길거리에서 지내다 보면 결국 마약에 손을 댈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업에 필요한 모든 것은 제공해 주는 대가로 학교에 출석하고, 일 주일에 한 번씩은 선교관에서 만나서 나와 간단한 모임을 갖기로 했다. 필요한 것도 챙겨주고, 간단한 성경 말씀이라도 들려 줄 예정이었다.
우선 시범적으로 6명을 학교에 등록 시켰다. 한 일 주일 동안은 아이들이 잘 다녔다. 학교 가니까 너무 좋다고 한다. 나도 너무 기뻤다. 그런데 이 주일째 되어서는 속상한 이야기가 들려 오기 시작한다. 아이들 학교에 더 이상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를 찾아가 봤다. 아이들이 등교하지 않았다. 집을 찾아가서 물어 봤다. 교복을 빨았는데 비가 와서 마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기에 들어서면서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때가 있다. 이해할만 하다고 생각되어서 교복 한벌씩을 더 사주었다. 그런데, 몇 일 후에는 더 속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이 학교 가방이니, 교복이니, 신발이니 해서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 버렸다는 것이다.
너무 속상했다. 화도 났다. 도와 주고 싶어도 도움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도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가 생각났다. ‘어떤 왕이 아들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서 잔치를 준비하여 많은 사람을 초청했는데 초청 받은 사람들이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데면서 초대를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거리에 나가고, 광장에 나가고, 사거리에 가서 아무나 초청을 해서 잔치 자리를 채웠다’는 비유가 생각났다. 속상하지만 그래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소망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순종은 우리의 논리와 상반이 되어도 행할 때 진정한 순종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것 저것 따지고, 논리적으로 이유를 찾아서는 순종할 수 없다. 뜻은 나중에 알게 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결국은 평안과 유익이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순종의 행동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손길을 바라보는 것이다. 홍해를 가른 것도 숨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모세의 순종으로 이루어졌다. 다니엘의 생명도 하나님께 순종하였기에 풀무불 속에서도 보호를 받는 기적을 체험했다. 포도주로 변하게 된 기적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빈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부었던 종들의 순종으로 이루어졌다.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케 하는 믿음의 신앙이다. 그렇기에 의미를 파악하는 것보다 순종하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삶이 순종의 연속일 때 축복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선교도 다를 바 없다. 아무리 속상해도,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축복이 있다. ‘오늘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순종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아이들을 다시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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