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숙자 진료실을 준비하며


( 5:25 이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 상처를 입고 길거리에 있는 여인


본문의 여인은 당시 불결하게 취급되던 혈루증 12 앓았다. 많은 의사들로부터 많은 치료를 받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러다 보니 가지고 있던 재산도 떨어졌다. 도리어 병만 심해지는 고통을 당했다. 그러니 얼마나 절망에 빠졌을까? 이렇게 어떤 치료도 효험이 없고, 낙망 가운데 있을 ,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마음을 열었다. 앉은뱅이도 일어나고, 맹인도 눈을 뜨고, 나병환자도 고침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분의 이름이 예수라고 했다. 믿음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나음을 입었다는 기적적인 사건으로 본문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처럼 절망 속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때 희망과 기쁨을 얻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이름이 익숙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절망할 ,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에 희망이 있다 역설했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그리고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존재 한다.

그래서 마약 중독 무숙자들에게는 희망의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절대적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무숙자 사역관에 찾아오는 마약 중독 무숙자들은 자신이 절망 속에 갖혀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른다. 12년간의 혈류병 보다 병에 걸려 있음에도 모른다. 병에 걸린 사람들 중에는 종류가 있다고 한다.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열심으로 찾아 다니는 사람, 병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사는 사람,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다. 마약 중독자들은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도 모를 아니라, 알아도 그만이다. 어차피 삶을 포기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절망보다 무서운 것은 포기라고 하겠다.

위의 사진은 길거리에 누워 있는 마약 중독자 여인이다. 일전에 칼을 맞았다고 한다. 무슨 이유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사건의 상황만 말해 줬다. 길거리에 누워서 자는 중에 지나가서 어떤 이가 자신의 다리에 칼질을 깊숙히 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선교관에 알려 왔고, 보건소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했다. 후에 우리 선교관에 정기적으로 와서 간단한 소독을 받았다. 상처를 만지는 사역자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준다. 나는 에이즈 소유자 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올해의 기도 제목 중에 하나가 무숙자 사역관에 진료소를 건축하는 것이다. 진료소를 통하여서 이곳에 찾아 오는 무숙자들에게와 주위의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의 선물을 나누어 주고 싶다. 진료소 준비를 위해서 얼마 전부터 이곳에서 의료 사역을 하고 있는 Dr. Sirker라는 선교사와 만남을 이루어 왔다. 분은 현재 한달에 1000 이상 진료를 하는 선교 진료소를 돌보고 있고, 5 개의 수술실을 갖춘 종합 병원을 건축 중이다. 심장 수술까지 있는 시설이라고 한다. 선교 단체와 협력하여서 분의 선교 병원의 부속 진료소와 같은 관계로 진료소를 운영할 계획이다. 지난 월요일에는 나라의 보건국에서 의료 진료소 허가를 받기 위한 건물 요구 조건을 받아 왔다. 진료실은 적어도 15 평방 미터, 환자 대기실도 적어도 15 평방 미터에 화장실이 남녀 구분되어 설치 되어야 , 그리고 약국도 하나 있어야 , 등등과 같이 내용들을 담고 있고, 의료 진료를 위한 기구들의 목록들도 받아왔다.

어제는 이곳 현지인 중에 건축설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축 설계도를 부탁한다는 내용을 전하기 위함이다. 보건국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설계도부터 가지고 오라고 요구를 한다. 과정도 복잡하다. 이런 일을 준비하면서 니카라과에 대한 생각을 보았다. 국민의 80프로가 빈민 수준으로 살고 있는 후진국이면서 미국과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규제 조건는 선진국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일이 이루어지기가 힘들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뇌물로서 그런 규제를 넘어가는 부조리를 낳는다.

예수님께 찾아 혈루병 여인은 그래도 낫기를 원하는 간절함으로 주님을 찾았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 나는 믿음의 기적을 창출해 낸다. 치유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우리 무숙자 사역관을 찾아 오는 이들은 그런 간절함 조차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포기한 자들이다. 절망이라는 선도 넘어서서 아래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한결같이 찾아 가고 있다는 복음을 진료소를 통해서 전하기를 원한다. 우리 인간은 포기했어도 사랑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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