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숙자 사역의 방향 전환

(옆의 사진은 재활 사역을 배우기 위해서 방문한 아길라스라는 기독교 재활원의 모습이다. More Pictures)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누에나방은 번데기에서 고치를 뚫고 나와야 나비로 변한다. 고치에는 바늘구멍만한 틈이 있다. 그 틈으로 나방이 나오기 위해 꼬박 한나절을 애쓴다. 그 힘든 과정을 치르고 나와 화려한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좁은 구멍을 어렵게 어렵게 나온 나비는 날아 가는데, 쉽사리 구멍을 벗어난 나방은 날지 못하고 떨어져 죽는다. ? 좁은 구멍을 나오려는 발버둥과 몸부림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힘든 고난이 날개 근육을 강하게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어렵게 나오고는 있는 나비를 위하는 마음으로 구멍을 뚫어 주면 결국 그 나방을 죽이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돕기를 원해도 함부로 도울 수 없다. 한시적인 도움은 도리어 마약과 같아서 무능하게 만들고 결국 게으름과 타락을 불러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편하게 왕위에 오른 사울 왕이 아니라 고난의 과정을 걸었던 다윗 왕이 위대한 왕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과 같다고 하겠다. 고난의 과정을 겪도록 지켜보고 계셨던 하나님의 기다림은 진정으로 다윗을 위한 사랑이었고, 다윗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요셉의 고난도 마찬가지다. 쉽게 살았다면 아마도 당시 강국인 애굽의 총리가 아니라, 변방에 맴도는 거주민의 족장 정도로 인생을 마쳤을 가능성이 많다. 고난은 축복의 진행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약 상용 무숙자 사역에 방향을 조정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들을 재활의 길로 인도하는 사역으로 준비하고 있다. 사실 여태껏 해 왔듯이 조건 없이 나누어 주는 사역을 하면 내 마음이 흐뭇하다. 조건을 따질 것 없기에 나도 편하다. 그들과의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된다. 고민 할 필요도 없다. 그들도 좋아하고 나도 기분은 좋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당장의 도움 이상은 되지 않는다. 배고픔만 해결해 준다. 반면에 지금과 같이 파괴적으로 살아도 된다고 허락해 주는 경우가 된다.

물론 무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사역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은 절대 아니다. 지난 일년 동안 해 왔던 사역은 그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었고 보람된 사역이었다. 마약 상용 무숙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했다. 하나님의 사랑도 전했다.

그러나 이제 변화를 추구하는 이유라면, 그들을 더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백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두고 90의 효과를 얻는 방법을 버리는 것이 옳다. 그러나, 90의 효과를 얻은 것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무 야박하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의 사역은 앞으로 재활의 쪽으로 방향 전환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하겠다. 지난 1년 동안의 사역을 통해서 그들과 가까워졌다. 그들은 나를 신뢰하게 되었고 나는 그들의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은 생략될 수 없는 필수이기도 있다. 로마서

마약 상용 무숙자들을 재활의 길로 이끈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지혜와 인내와 사랑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재활의 길을 자원해서 들어 가도 힘든데, 자원하지도 않는 자들이고 어려서부터 마약 속에 살아왔던 자들을 재활로 유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거리의 생활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거리 생활의 자유와 마약의 묶임을 선호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마약을 이용하는 악한 영과의 싸움이며, 인간의 가장 악한 본성인 게으름과 자기 쾌락과의 씨름이다. 그렇기에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불가능함을 안다.

성령의 강하신 역사와 인도하심, 그리고 마약과 매춘과 게으름으로 그들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힘있는 중보기도를 부탁드린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Tranquilo - 트랑킬로

안식년을 마치며

니카라과의 교육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