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2월 10, 2011

목회자 훈련원


올해에도 감사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딸 둘이 같은 대학에서 함께 대학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라서 그런지 대학에서 잘 적응할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같은 대학으로 진학을 하여서 걱정거리를 덜어 주셨다. 그런 것까지 섬세하게 돌보아 주시고 인도해 주심에 감사하다.

무숙자 센터에 아동 돌봄 센터를 시작한 것도 감사하다. 사랑이 많으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지역 아이들에게 꼭 필요했던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는 것도 감사하다. 요즘에는 방학기간이라서 그런지 40명 이상의 아동들이 찾아 온다. 말씀과 사랑으로 그들의 영과 혼을 살찌우는 사역이다. 날마다 먹임으로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다. 어려서 받지 못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자라면서 마약과 매춘, 임신 등으로 인생을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목회자 훈련원 사역의 열매도 귀하다. 지난 토요일에 11명이 수료식을 가졌다. 엘파라이소 지역의 목사님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연장 교육 형식으로 시작했었다. 마나구아에서 교수들을 초청해서 시작한 작은 모임이었지만 생각보다 참석하신 분들의 열심에 감동했다. 25명으로 시작해서 11명의 수료자가 생긴 것은 기대 밖의 큰 결실이다. 일년의 기간을 성실과 열심으로 참석해 주신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멀리 마나구아에서 찾아와 섬겨주신 모든 분들이게 감사할 뿐이다.

내년에도 다시 했으면 좋겠다는 참석자들의 부탁으로 대표격인 목회자들과 교수(선생님) 두 분이 함께 모여 계획을 잡아 봤다. 더 많은 분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로 장소를 마나구아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훈련 프로그램 참석 예상자의 수를 이리 저리 알아 봤더니 60명 이상이 참석하실 수 있다고 하신다. 니카라과 백성들의 마음이 원래 선해서 전구 선교사의 귀에 듣기 좋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되지만 60명 이상이라면 적지 않은 수다. 1월 14일로 계획된 준비 모임을 갖고, 2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된다.

니카라과 땅에서 목회자 훈련은 귀한 사역이다. 나라의 평균 교육 수준이 초등학교 4학년이다. 특별히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의 수준은 더 열악하다. 목회자들의 교육 수준이 일반인들의 평균 교육 수준 이상일 것이라고 예상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된다. 그렇기에 신학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신 분들이 90프로 이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반 교육 과정을 완료한 후에나 받아 주는 신학 대학은 목회를 꿈꾸는 일반 성도들에게는 구름잡기와 같이 비현실적이다. 더군다나 대학 과정을 완수한 후 입학 허가가 되는 신학원은 생각 조차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목회자 훈련원과 같은 목회자 비정규 신학 교육 기관의 필요가 크다.

‘하나님의 일에 무슨 자격이 필요합니까? 믿음과 열정, 그리고 소명만 확실하면 되지…’ 라고 주장하시는 분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사용하셨다. 반면에 신학적, 성서적, 목회적 훈련의 부재로 인하여서 발생하는 목회 현장의 부작용와 교회의 아픔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올해 2011년의 사역을 돌아 보며 ‘모두 주님이 이루셨으니 주님이 영광 받으소서’ 라는 감사의 손을 높이 올려 사랑의 아버지를 찬양한다.

올해에도 감사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딸 둘이 같은 대학에서 함께 대학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라서 그런지 대학에서 잘 적응할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같은 대학으로 진학을 하여서 걱정거리를 덜어 주셨다. 그런 것까지 섬세하게 돌보아 주시고 인도해 주심에 감사하다.

무숙자 센터에 아동 돌봄 센터를 시작한 것도 감사하다. 사랑이 많으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지역 아이들에게 꼭 필요했던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는 것도 감사하다. 요즘에는 방학기간이라서 그런지 40명 이상의 아동들이 찾아 온다. 말씀과 사랑으로 그들의 영과 혼을 살찌우는 사역이다. 날마다 먹임으로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다. 어려서 받지 못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자라면서 마약과 매춘, 임신 등으로 인생을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목회자 훈련원 사역의 열매도 귀하다. 지난 토요일에 11명이 수료식을 가졌다. 엘파라이소 지역의 목사님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연장 교육 형식으로 시작했었다. 마나구아에서 교수들을 초청해서 시작한 작은 모임이었지만 생각보다 참석하신 분들의 열심에 감동했다. 25명으로 시작해서 11명의 수료자가 생긴 것은 기대 밖의 큰 결실이다. 일년의 기간을 성실과 열심으로 참석해 주신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멀리 마나구아에서 찾아와 섬겨주신 모든 분들이게 감사할 뿐이다.

내년에도 다시 했으면 좋겠다는 참석자들의 부탁으로 대표격인 목회자들과 교수(선생님) 두 분이 함께 모여 계획을 잡아 봤다. 더 많은 분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로 장소를 마나구아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훈련 프로그램 참석 예상자의 수를 이리 저리 알아 봤더니 60명 이상이 참석하실 수 있다고 하신다. 니카라과 백성들의 마음이 원래 선해서 전구 선교사의 귀에 듣기 좋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되지만 60명 이상이라면 적지 않은 수다. 1월 14일로 계획된 준비 모임을 갖고, 2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된다.

니카라과 땅에서 목회자 훈련은 귀한 사역이다. 나라의 평균 교육 수준이 초등학교 4학년이다. 특별히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의 수준은 더 열악하다. 목회자들의 교육 수준이 일반인들의 평균 교육 수준 이상일 것이라고 예상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된다. 그렇기에 신학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신 분들이 90프로 이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반 교육 과정을 완료한 후에나 받아 주는 신학 대학은 목회를 꿈꾸는 일반 성도들에게는 구름잡기와 같이 비현실적이다. 더군다나 대학 과정을 완수한 후 입학 허가가 되는 신학원은 생각 조차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목회자 훈련원과 같은 목회자 비정규 신학 교육 기관의 필요가 크다.

‘하나님의 일에 무슨 자격이 필요합니까? 믿음과 열정, 그리고 소명만 확실하면 되지…’ 라고 주장하시는 분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사용하셨다. 반면에 신학적, 성서적, 목회적 훈련의 부재로 인하여서 발생하는 목회 현장의 부작용와 교회의 아픔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올해 2011년의 사역을 돌아 보며 ‘모두 주님이 이루셨으니 주님이 영광 받으소서’ 라는 감사의 손을 높이 올려 사랑의 아버지를 찬양한다.

금요일, 10월 28, 2011

Tranquilo - 트랑킬로


니카라과에 비가 쏟아 부은지 4일째 되었다. 동쪽 에 태풍이 오고 있나 보다. 동쪽 해안으로 태풍이 올 때마다 서로 약속을 했듯이 서쪽에는 몇 일동안 비가 쏟아진다. 이럴 때면 무숙자 식구들이 걱정된다. 특별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걱정된다. 어디서 밤을 보내실까? 우기가 찾아 올 때마다 늘 걱정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또는 할 수 없는) 내 자신에 대해 속상할 뿐이다. 몇일 동안 어린이 인성 교육 센터의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소낙비가 오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결석한다. 삼십 명까지 오던 아이들이 겨우 대여섯 명의 아이들만 찾아 온다.

마나구아가 수도이지만 하수도 시설 등등 기반 시설이 열악한 나라다. 그래서 큰 사고를 격을 수있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마비가 쏟아지면 아이들은 학교 조차도 가지 않는 것이 일반이다. 이런 때에는 으슬으슬한 추위(시원함?)에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즐비 하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다시금 인정케 한다. 반면에, 비가 와서 감사 한 것들도 있다. 일년 내내 더운 니카라과에서 가끔 시원함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덕분에 선교 클리닉도 바뻐서 감사하다. 감사와 평안는 이곳 니카라과의 형제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 큰 인생의 교훈이다. 니카라과 사람들은 보고 있으면 절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떻게 저런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함 가운데 평강을 유지 할 수 있을까?”

평안을 사랑하는 니카라과 백성들은 “Tranquilo -트랑킬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영어로 직역하자면 ‘Quiet’ 이고, 우리말로 하자면 ‘잠잠한’이라는 형용사라고 하면 되겠다. 말하자면 큰 흔들림이 없는 수면의 잠잠함, 큰 변화없는 날씨의 고요함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다. 자신의 삶이나 마음에 큰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표현할 때, “트랑킬로”라고 말한다. 무슨 사건이 생긴 후에 ‘괜찬냐’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트랑킬로’ 로 답한다.– ‘별 일없습니다. ‘ ‘마음이 평안하다’라는 뜻이다. 무숙자 선교관에서 늘 일어나는 서로간의 말다툼이 있은 후에’괜찮냐’고 물으면 ‘트랑킬로’라고 답한다. – 마음에 흔들림 없이평강을 유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화가 날 만한 일을 당한 경우에 ‘어떠냐?’고 물으면 ‘트랑킬로’라고 답한다. – 그런 상황 가운데에도 평강을 유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해서 미안한 마음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면, ‘트랑킬로, 트랑킬로’라고 답한다. ‘괜찮습니다.’ 라는 의미다. 나도 요즘은 상대방이 늦어도 ‘트랑킬로’하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내가 손해 보고 살겠다’라고 작정하면 ‘트랑킬로’ 하지 못 할 이유가 없다. 상황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나면 ‘트랑킬로’ 하다.

상황을 받아드림에 익숙한 니카라과 백성들은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드물다. 모든 상황에서 평강을 유지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선한 민족이다. 조그만 일에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는 우리 한국 민족에게 부족한 ‘트랑킬로’를 이 민족은 누린다.

주어진 상황에서 감사 제목을 찾고, 만약 감사함을 찾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대로 받아드리고 평강을 유지하는 삶을 이곳에서 배운다. 또한 발전과 풍요 속에서 살지만, 받아드리지 못함에서 유발되는 갈등과 복잡함, 두려움과 걱정, 후회와 불평 속에서 트랑킬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의 삶을 반성한다.

그러나 진정한 ‘트랑킬로’는 하늘의 선물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없어서 숙명적으로 받아 드려야 하기에 받아 드리는 니카라과 식의 평강이 아니라, 평강의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아는 지혜와 그에게 모든 상황을 맡길 수 있는 믿음으로 살기에 누리는 믿는 자들의 평강이 진정한 평강이다. 평강을 잃지 않는 삶이 믿음의 삶이며 진정으로 복이 있는 자의 삶이다. 전도서 4장 6절의 말씀이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안함이 더 나으니라”

우리 모두가 데살로니아 후서 3장 16절의 축복을 누리기를 기도한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오늘도 장마 비 속에 함께 쏟아 부어 주시는 주님의 평강을 느껴 본다.

수요일, 9월 14, 2011

섬김은 기쁨을 낳는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멀게 느껴진다. 사실 20분도 걸리지 않는 길이지만 가는 길보다 돌아 오는 길은 길다. 시간의 길이는 주관적이라는 말이 맞다.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전적으로 나의 피곤함에 있음이 틀림없다. 살아도 살아도 익숙해 질 수 없는 선교지의 열대성 기후가 그렇게 만든다. 오래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 할 수 없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그렇지 않다. 돌아 오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속으로 속삭였다. 그렇지만 뚜렷한 울림이 있었다. ‘아, 너무 좋다…..’

누구라도 곁에 있었다면, ‘참 좋지요?’ 라고 말하며 질문 형식으로 대화를 끄집어 냈을 것 같다. ‘뭐가 그리 좋아요?’라는 질문이 다시 돌아 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냥 마음이 흐믓해요… 나에게도 그 이유는 뚜렷하지 않고 정확이 꼬집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냥 마음에 기쁨과 만족함이 꽉 차 있어요.’ 차 밖에서 밀려 드는 습도는 자동차가 뿜어내는 시원한 에어콘 바람을 무시한다. 소낙비라도 시원하게 내려주면 이 습기를 잠시라도 씻어 버릴텐데…

집으로 오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왜 마음에 이런 기쁨으로 꽉 차 것일까? 그리고, 그 형제의 얼굴이 떠 올랐다. 임마누엘 말티네스 (Imanuel Martinez): 남, 58세, 무숙자, 가족과는 연락이 끊겼음, 촌딸레스 출신, 전 산타니스타 해방군, 전 알콜 중독자 ….

오늘 아침도 늘 하듯이 무숙자 선교관에 섬기고 있었다. 임마누엘 형제가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평소에 조용하고 숫기가 별로 없는 이 형제는 자기의 전 재산이 들어 있는 백팩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한 동안 뒤적거린 후에 조그만 무엇인가를 드디어 찾아낸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조용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가득히 담기는 것이 보였다. 앞에 서 있는 나에게 그것을 건내 주면서 설명을 빼뜨리지 않는다. ‘어제 교회에서 받은 선물인데 당신에게 주고 싶었다’는 내용을 더듬 거리며 말했다. 성탄절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다는 장식이다. 나무로 만든 싸구려지만 임마누엘 형제의 마음이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감사의 인사는 그를 쑥스럽게 만들었다. 슬그머니 빠져 나가려는 그를 붙잡고 사진이나 하나 찍자고 했다. 주위의 무숙자 형제 자매들이 자기도 함께 찍겠다며 달라 붙기 시작했다. 임마누엘 형제의 작은 선물은 나의 마음을 하루 종일 붙잡고 놓아 주질 않았다. 섬김은 진정으로 축복이다. 너무 큰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은 큰 감사의 조건이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구름이 터져버렸다. 잠시 후면 터트리려고 울먹이던 아기와 같이 구름의 울움이 터졌다. 차창을 굵은 빗방울이 구분하지 않고 마구 공격한다. 넘치도록 흐르는 빗물을 씻어내기 위해서 윈도우 와이퍼를 단게를 올리며 조정했다. 결국 최고의 빠르기까기 조정될 정도로 쏟아 붙고 있었다.

내리는 소낙비가 습도를 조절해 시원해졌다.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십니까?’ 오늘 밤은 조금 시원하게 지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마음이 기뻤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 합니다.’라고 외쳤다. 감사는 주어지는 것보다 감사를 찾는 것이 기독교 영성이다. 나의 마음은 오늘 묵상했던 시편 57편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월요일, 4월 18, 2011

성령은 섬김을 위한 영


<-- 의료 선교관에서 전도지를 읽고 있는 환자들

오늘은 의료 선교 사역의 스테프들과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간단하게 나누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물론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날 경우도 간혹 있지만,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결국 하나님 섬김이다. 또한 이웃 섬김에 있다. 성령의 능력을 얻은 결과가 자기 중심이 되거나 자신만을 위한 것일 때는 위험하다. 자기 자랑이나, 자기 만족을 위함이 되면 성령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성도의 삶 속에는 섬김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섬김을 위해서 살아가면 나머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이행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대충 그런 메세지의 내용이었다.)

그러니, 다음 주에는 ‘더욱 열심이 섬기자’고 말했다. 설교는 아니었지만 말씀을 통한 짧은 메세지로 프로비덴시아 의료 선교 클리닉의 존재 목적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경우가 되었다. 다음 주에는 여성 암 치료 및 예방 프로그램을 미국의 선교 단체와 함께 진행하는 스케줄이 잡혀 있음을 염두에 두고 나눈 말씀이다. Cervical Cryotherapy (자궁 경관부 냉동 요법) 와 LEEP ( loop electrosurgical excision procedure) 을 통하여 여성의 자궁 경관부에 있을 수 있는 비정상적인 부분을 잘라내고, 그럼으로 자궁암으로 발전하기 전에 치료하는 시술이 된다.

이 시술을 위해서 미국의 선교 기관에서 전문의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 클리닉의 여성과 의사는 그와 함께 일하며 배우는 기간이 되는 것이다. 다음 주에는 일반적인 환자들 이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이 프로그램의 해택을 받기 위해서 드나 들게 될 것이다. 의료 선교관 전체가 들석 들석할 것이고, 환자들에 치어서 모든 스테프들이 지치기 쉬운 경우다. 단단하게 마음의 준비, 영적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심신의 피곤함을 견디지 못해서 짜증 나는 일주일이다.

특별히 지역의 매춘 여성들을 중심으로 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 자매들은 마음에 상처가 많은 경우이기에 일반인들의 조그마한 말과 행동의 실수도 자신을 향한 돌 던짐으로 받아 들이기 쉽상이다. 무조건 겸손하게 섬겨야 하는 때이다. 섬김은 육신과 영혼과 정신 등, 총체적인 치유와 구원를 목표로 한다. 섬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되어지고, 그 사랑으로 받아 드리어 하나님 사랑/구원에 이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섬김 자체가 목표일 때 우리는 인도주의적인 봉사 차원을 벋어 날 수 없다.

예수님도 섬기셨다. 그의 삶은 섬김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섬김은 우리 삶을 온전케 함이 목적을 뿐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깨달음을 통한 구원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총체적인 구원이다. 그래서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삶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고, 더 나아가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까지도 다루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신다. “네가 섬겨야 할 너의 이웃은 누구냐?” (누가복음 10장 36절) 우리의 대답은 ‘구원이 필요한 모든 이가 우리의 이웃입니다.’ 일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가서 그들을 섬기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목요일, 3월 03, 2011

사랑하는 정헌택 장로님을 보내며

장로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정헌택 장로님의 먼저 떠나심은 슬픔이고 아픔이고 아쉬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왜?’라는 답이 없는 질문을 많이 올렸습니다. 언제가는 누구나 거쳐 가야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떠나셨다고 하니 혼돈스러워졌습니다.

그러던 중 죽음에 대한 어떤 시를 읽었습니다.
내용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항구에 아름다운 한 척의 배가 정착되어 있었다. 이제 출항의 시간이 되어서 배는 항구를 떠났다. 멀리 멀리 떠나 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만 보이던 배가 작아지고 작아지면서 결국 바다와 하늘이 닿는 그 곳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는 하늘 끝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배를 보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이제 사라졌구나!” 그 옆에 사람이 말했다. “사라졌다니요?” 그리고는 설명했다. “사라진 것은 당신의 눈에서만 사라진 것입니다. 사라지는 그 순간,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에게는 나타나는 것죠.”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죠. 저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에게는 나타나는것이 죽음이죠.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쓰셨나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사랑하는 고 정헌택 장로님의 죽음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경건한 성도가 오는 귀중한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헌택장로님은 거룩하신 분이었습니다. 걷는 모습과 몸가짐이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점잔케 목소리를 내리고 말하는 외적인 거룩함도 아닙니다. 가끔 멋진 정장을 하고 나타나실 때는 파마라도 하신 것같은 굵은 곱슬 머리가 어우려져 무슨 영화 배우가 나타나셨나 할 정도로 멋도 부리는 분이었습니다. 말씀 하실 때에는 생각같이 빨리 입이 따라 주지 않으셔서 그러신지 가끔 더듬 거리시기도 하셨습니다. 뭐가 그리 바쁘신지 성가대에서 주일 예배에 들어가실 때의 걸음도 제일 빠르셨습니다. 외적인 거룩한 모습은 별로 찾아 보기 힘드신 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정헌택 장로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셨기에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기쁨으로 여기신 분도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장로님을 뵈면서 저런 분이 목사가 되었으면 최고였을텐데 하는 생각이 날 정도로 주님의 사랑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정이 허락하시는 한 교회의 예배는 절대로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투병 중에도 성가대를 서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겠죠. 주님이 장로님의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겠죠.

교회 건축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교회를 떠나시기 전에 불쑥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건축 빨리 진행합시다. 저는 세컨드 몰게지 신청해 놓고 있습니다. 결정만 되면 건축 헌금 먼저 다 드리고 나중에 갚아 나가렵니다.” 주님의 성전이 건축되는 것을 소원하신 것은 장로님께서 주님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우리 장로님은 주님을 사랑하셨기에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아끼셨던 분이셨습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마음이 좁은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다.”는 격언과 같이 장로님은 대화 중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원치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저 짧게 ‘그럴 수도 있죠. 목사님’하고 말을 정리하는 크신 분이셨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시는 곧으심과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시는 용기가 있으신 분셨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교회를 섬기셨고, 남들의 칭찬과 관심에 따라 움직이지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분을 저 멀리로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너 편에서 기쁨으로 기다리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말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면, 그 분의 죽음도 아름답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 장로님의 삶은 아름다웠습니다. 거룩했습니다. 축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죽음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경건한 자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니라” 존경하는 정헌택 장로님과 같은 분이 내 주위에 있었던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저편에 계신 하나님께 먼저 보내 드립니다. 그토록 사랑하셨고 섬기셨던 그 분의 품에서 평안하세요. 그 분의 사랑 안에 이제 편히 거하세요. 거룩하게 사셨던 장로님의 마지막 모습을 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멀리서나마 기도로 눈물로 함께 합니다.

니카라과에서 선교사 전구 드림

일요일, 2월 27, 2011

아동 인성 신앙 교육 센타


벌써 4년은 된 것 같다. 훌리아 라는 11살쯤 된 예쁘장한 여자 아이였다. 무숙자 센터에 볼 때마다 수줍음없이 다가와 껴안기며 인사했었다. 훌리아는 무숙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무숙자 사역관이 위치한 큰 길을 건너서 킨타니나 라는 동네에 사는 아이다. 그곳은 마나구아의 모든 오물로 오염되어 냄새가 지독한 마나구아 호수에 위치한다. 선진국과 반대로 니카라과은 호수 주변에 가장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이 모인다. 그러다 보니 범죄도 많고, 마약과 매춘이 호수 물같이 범람한 지역이다. 그곳의 부모들은 아침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이고, 집에 있다면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혼자 자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물론 학교가 있지만 소낙비만 내려도 교사들이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기가 태반인 책임지지 않는 공립 교육에 맡겨진다.

벌써 1년 반쯤 되었나 보다. 훌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 아이들에게 물어 봐도 어디갔는지 모르겠다는 대답 뿐이다. 나도 그런가 보다 하며 지냈다. 부모가 조금 더 나은 지역으로 이사하면 아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바람직한 경우이기를 은근히 바란다. 그런데 훌리아가 지난 여름에 무숙자 사역관에 다시 나타났다. 너무 반가워서 안아 주려고 하는데 움추린다. 수줍음을 타는 듯하다. 벌써 열 네 다섯은 되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 동안의 소식을 들어 보려고 말을 걸어도 그저 피하는 느낌이다. 식사를 받고 나면 무숙자 센터를 바쁘게 나간다. 급하게 돌볼 일이라도 있는 소녀 마냥….

3개월 전쯤 되었나 보다. 훌리아가 동생인듯 싶은 아이를 하나 안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빼앗듯이 받아 안았다. ‘동생이냐?, 조카냐?’ 물으면 아이를 흔들었다. 처음 안기는 나에게도 잘 안겨있어 너무 귀여웠다. 훌리아 자신도 어린 나이에 학교도 가지 못하고 동생을 돌봐야 하는 처지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이 나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데세니아. 이름도 너무 예쁘다. ‘데세니아, 데세니아, 데세니아,… 얼 럴러러…’ 부르면서 아이를 흔들어 줬다. 아이도 좋아하며 조그만 얼굴에 웃움이 가득하다. ‘데세니아가 몇 달 되었니?’ 물어 본다. ‘4개월…’

‘아이, 예뻐라….’ ‘엄마는?’ 아이 젖은 어떻게 먹이나 걱정이 되어 물어 봤다. 분유를 구입해서 먹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훌리아가 엄마예요’ 옆에 있던 친구 아이가 대신 답니다. 훌리아는 얼굴이 불거지면서 사라진다. 너무 걸음이 빨라서 저러다 데세니아를 떨어트리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잘못된 질문이었구나… 내일 다시 와야 할테데…’ 감사하게도 그 다음 날에도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가 아이를 키우는구나…

훌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주었으면 뭔가 틀려졌을까? 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일찍 돌보지 못했던 내 잘못이지…’, ‘밥만 줘서는 않돼…’, ‘어른들은 그렇다고 치고, 아이들을 먼저 챙겨야겠다… ‘ , ‘어른들이야 변화되기 힘들지만, 아이들은 잘 교육하면 아직은 늦지 않았다.’

그래서 전에 의료 선교관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올해부터 아동 인성 신앙 교육 센타를 시작한다. 아침에 모이면, 말씀 듣고, 함께 놀고, 좋은 만화 영화도 보고, 점심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글씨 쓰는 것도 배우고 하면서 지내고 있다. 학교는 아니지만 학교보다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한 명이라도 인생이 변화될 수 있다면 하는 기도로 시작했다. 어제 왔던 7살 된 여자아이가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해서 우리 모두 걱정하고 있다. ‘선생님, 내 배 속에 인형 하나 갖고 싶어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기도도 많이 필요하다.

일요일, 1월 16, 2011

2011년의 계획


새해가 되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 갑니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인도하셔서 저의 삶을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은 계획없이 한 해를 시작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믿음이라고 해야 할지, 무책임이라고 해야 할지… 혼돈 되는 경우다. 그 삶에서 열매를 봐야만 판단이 서는 경우다. 반면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있다. 삶은 스마트 (SMART)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계획은 철저하게 S-M-A-R-T 하다. 구체적 (Specific)이고, 평가할 수 있고 (Measurable), 달성할 수 있고 (Achievable), 타당하고 (Relevant), 기한이 정해진 (Time-bound)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그렇게 철저히 세우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방자한 사람이라 해야 할지… 이런 경우도 난감하다. 미래의 계획에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 시킬 수 있는 믿음의 자리가 없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넉넉함과 여유가 없다. 2011년을 시작하면서 무책임하지 않아야 하고, 방자하지 않게 시작해야 한다.

한편, 계획을 세울 때에는 해야 할 것(Doing)을 중심으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복음 12 장의 한 부자가 그랬다. 밭에 수확이 풍성해서 곳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 부자는 많은 수확을 위해서 곳간을 더 크게 지을 것만을 계획했다. 그리고 편히 쉬고 즐기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해야 할 것, 즉 Doing 에는 많은 관심을 두었지만, 되어야 할 것, 즉 Being 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풍성한 수확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성품, 즉 Being은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부자를 그날 저녁으로 데려가셨다. 계획을 세울 때, 해야 할 것도 세워야 하지만, 되어야 할 것도 함께 세우는 2011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주어진 2011년을 계획해 보았다. 해야 할 것은 의료 사역관의 발전을 위해서 Diagnostic Center 준비해 보려 한다. EKG, X ray, Ultrasound, Endoscopy 를 갖추는 검사실을 만들어 보려 계획하며 기도한다. 그렇게 하면 여성 암 퇴치 프로그램, 매춘 직업 여성 섬김 프로그램, 지역 어린이 돌봄 프로그램, 지역 교단 목사님들 섬김 프로그램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3살부터 6살까지 돌보는 기독교 아동 인성 교육 센터를 무숙자 사역관 곁에 시작할 계획이다. 오랫 동안 계획해 왔던 사역이다. 학교 입학 전의 아동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인성, 신앙 교육을 생각해 본다. 교육 센터에 있는 우리 아이들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아 진다.

그리고 되어야 할 것으로는 절제를 택했다. Self Control 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하나다. 절제에는 시간의 절제, 물질의 절제, 육신의 본능의 절제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언어의 절제를 생각했다. 언어의 절제는 생각의 절제다. 언어 안에는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언어 가운데 아름다운 언어, 생명의 말, 칭찬의 말, 따뜻한 말, 긍정의 말을 해야겠다. 인생의 연수를 더해 가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말에 따라서 변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은 믿음의 능력을 누리는 삶을 산다. 소망의 말은 그 사람의 미래를 보장한다. 사랑의 말은 상대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마음의 아픔을 정리하고 쓴 뿌리를 도려내 버린 깨끗하고 믿음이 풍성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이슬비 같이 스며든다.

2011년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또 한번 기회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함으로 시작한다.